복사기의 불꽃 속에서 피어난 삶의 기억
한무룡 컬럼위원 기자
입력 2025.10.31 pm03:10 기사승인 2025.11.03 am12:00
수동식 복사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, 그 크기부터가 압도적이었다. 1~2평을 차지하는 덩치에 일반 사무실은 엄두도 못 냈고, 오직 복사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에서만 볼 수 있었다. 복사 과정에는 인화성 물질이 다량 사용되었고, 그로 인한 화재는 흔한 일이었다.
지금은 사무실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은 복사기가 버튼 하나로 선명한 결과물을 뽑아내지만, 그 시절엔 복사 한 장에도 위험이 따랐다.
복사기의 초창기 모델은 검은 알갱이 형태의 토너를 사용했는데, 작업 중 이 알갱이가 부서지며 미세한 먼지가 되어 공기 중에 떠다녔다. 이 가루는 화약처럼 폭발성이 있었고, 복사면을 닦는 데 쓰이는 시너(thinner)는 인화성이 극도로 강했다.
구두와 바닥이 부딪혀 생긴 작은 불꽃 하나로도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, 말 그대로 불과 함께 살아가는 환경이었다.
복사 가게를 운영하던 지인이 있었다. 복사 수요가 많아 수입은 괜찮았지만, 크고 작은 불이 끊임없이 발생했다. 아무리 조심해도 불은 피할 수 없었고, 불이 나면 끄고, 망가진 기계를 고쳐 다시 일을 시작했다. 그의 얼굴과 손은 늘 검댕으로 뒤덮여 있었고, 복사기 옆에서 불을 끼고 사는 삶은 그 자체로 고단했다.
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. 불이 날 줄 알면서도, 생계를 위해 복사기를 돌렸다.
그 시절을 떠올리면 복사기와 함께한 기억뿐 아니라, 그 시대의 사람들과 분위기도 함께 떠오른다. 모든 것이 부족했고 기술도 뒤처졌지만, 그럼에도 좋았던 점이 있었다. 배움은 부족했지만, 사람들은 열심히 살았고 서로에게 인정이 있었다. 지금보다 더 위험하고 불편했지만, 그 속에서 피어난 삶의 온기와 사람들의 진심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.
그 시절 복사기의 불꽃은 단순한 위험이 아니라, 삶을 지탱하던 열정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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